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하이 전투 (문단 편집) === 전투의 시작 === 8월 9일, 일본 해군특별육전대 소속 오오야마 이사오 중위가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훙차오 공항]]에 난입하려다가 사살되는 [[훙차오 공항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측은 이를 트집잡아 중국군 보안대 철수와 공동조사를 요구했지만 중국측은 묵살하고 오히려 상하이 방어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상하이를 공격하기로 결정, 8월 13일 오전 9시 15분, 일본 해군 육전대 1개 분대가 횡병로, 보흥로의 중국군 기지에 도발을 감행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20분 만에 끝났으나 같은날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은 팔자교, 천통암, 보흥로, 보산로 등에서 일제히 대대적인 공격이 감행하여 자베이를 비롯한 상하이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했다. 또한 황포강의 일본 군함도 포격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부터를 상하이 전투의 시작으로 본다. 일본군은 5천명이고 중국군은 5만명으로 수적으로 중국이 압도적인 우세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선공하였음에도 중국군이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는데다가 무장상태도 좋아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장제스는 이런 수적 우세와 전 군사고문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건설한 젝트 라인을 믿고 일본 증원군이 상하이에 도착하기까지의 10일 간의 여유를 활용, 이 안에 상하이의 일본군을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고문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젝트 라인이 너무 구식인데다가 미완성이라 일본군에게 역포위당할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상하이에서 교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은 장제스는 반격하기로 마음을 굳힌 후였다. 장제스는 오후 2시, 상하이 주둔군을 9집단군으로 개편하고 상하이와 항저우의 일본군에 대한 총공격을 지시하였으며 8월 13일 밤 장즈중을 제9집단군 사령관으로 장파쿠이를 제8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제스는 기갑부대, 해공군을 총동원하고 어선과 상선을 자침시켜 양쯔강 입구를 봉쇄하여 일본 해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8월 14일 87사단이 일본인 구락부와 일본해군 연병장을 공격했으며 88사단이 팔자교에서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okyo_Asahi_shinbun_1937-08-14.jpg|width=100%]]}}}|| || 1937년 8월 14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mbing_outside_the_Palace_Hotel.jpg|width=100%]]}}}|| || 1937년 8월 14일자 중국 상하이 시가지 || 8월 14일 오전 7시, 미국인 고문 [[클레어 셰놀트]]의 지휘를 받는 중국 공군이 일본 해군 육상 기지와 물자 직접장, 일본군 3함대 함선들을 폭격했지만 악천후와 기술 미숙으로 큰 효과는 보지 못했고 중국 민간인 피해도 발생했다. 해안가의 포대와 중국 해군 군함들도 포격을 가했지만 성과는 신통찮았다. 같은날[* 혹은 8월 15일.] 오후 5시, 하남성 주가구에서 항저우로 비행하던 [[가오즈항]] 대대장 휘하 제4대대 17중대 소속 27대의 [[P-26]] 전투기가 일본 해군 96식 육상공격기 16대[* 장개석비록의 수치이며, 권성욱의 중일전쟁에서는 8대라고 쓰고 있다.]와 조우, 한대의 피해도 없이 6대를 격추시켰다.[* 이중에서 9대의 전투기를 인솔했던 모영초는 훗날 타이완 교통부 민영항공 국장을 지냈으며 대만과 일본이 단교하자 일본항공 타이베이 지점장에게 항공로 단절 통고서를 제출하였다.] 일본측 역시 반격에 나서 타이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가 출격하여 난징, 항저우, 광더, 난창, 우한을 폭격했다. 이 폭격은 해군의 실적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 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원래 목표는 나가사키의 기사라즈 항공대에 의한 난징에 대한 집중 공격이었으나 기상 악화로 인하여 타이완 항공기들이 출격한 것이다. 다음날부턴 난징 도양폭격이 개시되어 난징이 집중타격당했다. 거기에 일본 해군 항공모함 카가, 류조, 호쇼 등이 도착하여 함재기들이 가세함으로 많은 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공군도 반격하여 8월 21일 96식 육상항공기 4기를 격추시키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타이완까지 날아가 일본군 비행장 등에 폭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폭격기의 호위를 등한시하는 전술을 고집했기 때문에 중국 공군의 반격에 상당히 큰 피해를 입곤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습이 매우 심하여 공황에 빠진 상하이 시민들이 외국인 조계지로 몰려들었고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피해가 속출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기자 로즈 파머는 다음과 같이 상하이를 묘사했다. >고성능 폭약의 황색 연기가 지나간 후 난징 로는 공포의 현장을 드러냈다. 불타는 차량에서 치솟는 화염이 차 안에 가득 찬 탑승자들의 시체를 재로 만들고 있었다. 후이중 호텔과 팰리스 호텔의 현관 및 부속 건물에는 괴상망측한 인파가 몰렸다. 몸을 오므린 채 피신하고 있는 사람들의 파란색 작업복은 빨갛게 변한 채였다. 머리, 팔, 다리가 갈기갈기 찢겨 엉망진창으로 멀리 흩어져 있었고 시가 전차 맞은 편에는 키가 큰 유럽인이 있었는데, 하얀 플란넬 양복은 물든 곳 없이 깨끗했지만 그의 두개골은 부서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중화민국 정부는 728명이 죽었다고 공포했고 일본군의 공습이 이어지면서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8월 15일 일본 정부는 "지나군의 포악한 행동을 응징하고 또 난징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하여 이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8월 15일 여명, 중국군은 독일식 87, 88사단을 중심으로 반격에 돌입했다. 거기에 15사단, 36사단, 115사단 등 3개 사단이 증원되어 7만명의 중국군은 바쯔차오를 점령한 일본군을 축출하고 거세게 밀어붙여 일본 해군 훈련장을 비롯한 일본군의 주요 거점들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8월 17일 외무성 동아국장 이시이 다로가 육전대가 며칠도 더 버티지 못할 것이라 우려를 표명했고 8월 18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표단이 격화되는 전투 양상을 우려하여 전투 중지를 요청했지만 중일 양국이 거부했다. 중국은 만약 조계지에 일본군 고사포가 설치되면 묵과하지 않겠다고 대표단에게 경고했다. 같은 날 장즈중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서 전투를 독려했고 87사단은 양수포의 공장 지대의 일본군 방어선을 분쇄하였으며 36사단도 황푸 강 기슭에서 부두로 일본군을 밀어냈다. 이때 섣부르게 전진하던 중국군 경전차대가 일본군의 대전차포 사격에 격파되었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좁은 구역에 몰아넣었지만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중화기 결핍으로 인한 화력 부족으로 결정적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 일본군은 방어진지를 잘 갖추어놓은 상태였으며 육전재 자체에는 중화기가 빈약했으나 해군과 항공대의 지원으로 화력면에서 매우 우세했다. 19일에 중국군은 훙커우-양수포 선까지 진격했으나 앞서 언급한 화력의 부족과 강력한 일본 해군의 엄호로 인해 21일의 총공세가 실패한 이후로 중국군의 진격은 끝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상당한 선전에 장제스 역시 크게 고무되어 "상하이 전투는 매우 순조롭다. 영국의 제안이 실현되는 것을 계기로 일본을 상하이에서 철퇴시키고, 우리 경제의 지반을 회복하는 것도 오늘의 전황으로 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라고 일기에 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